코로나로 인한 3차 거리두기가 지속되었다. 이제 한계였다. 5개월 동안 스터디 카페와 헬스장만 오가 사람들과 말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밖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을 찾다가 유일하게 열리고 있는 동아리를 하나 발견했다. 동아리 이름은 ‘댄스 클럽’, 줄여서 '댄클'로 대학생들끼리 살사와 바차타 같은 사교 댄스를 배우는 곳이었다. 외국인도 모집하고, 수업은 영어로 진행된다고 하니, 외국어를 배우고 싶은 사람도 환영이라고 써 있었다. 무료는 아니었고, 대관비 등을 위해 달 4만 원 정도의 회비가 있었다.
유일하게 여는 곳이었지만, 사교 댄스 동아리라는 게 걱정되었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다같이 어울리는 분위기가 아니라 모두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할거야' 하는 분위기면 소외되는 편이었다. 인원 7명 성비 6대 1 정도로 몇몇 없는 여자애들에게 남자들이 대놓고 대시하는 구조이지 않을까. 여자들도 그걸 좋아하고.
그렇지만 이제 한계였다. 따분해서 미칠 거 같다. 마음에 안 들면 한 달 해보고 나가면 되지. 게다가 예전에 봤던 애니에서 주인공들이 왈츠를 추는모습이 강렬하게 남아, 언젠가 사교 댄스를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첫 수업을 들으러 갔더니 예상과 달리 사람들이 꽤 많았고, 남녀 성비도 반반이었다. 한 달 주기로 기수를 편성해 운영하는데, 내가 속한 기수는 14명 정도였고 성비도 비슷해 보였다. 동아리 전체 인원은 40명 정도일까. 가르치는 선생님 여섯 분이 계셨고, 여기서 배우다가 본격적으로 흥미가 생기면 선생님들이 운영하는 성인 대상 ‘LL 클럽’ 수업을 이어 들을 수 있는 구조인 듯했다.
외국인도 대여섯 명 있었고, 수업은 한국어와 영어를 번갈아 가르쳤다. 모두가 닉네임을 사용했는데, 예를 들어 ‘Nam-il’, ‘Sugar’, ‘Bred’ 같은 느낌으로 불렀다.
첫날 수업에서, 강사님이 댄스 홀에서의 기본 매너에 관해 설명했다. 댄스 홀에서 파트너와 함께 추는 춤을 소셜 댄스라 한다고 했다.
"When you propose a woman for dance, 안 받아들인다고 뭐라 하면 안 됩니다. It's just a proposal. 만약 그런데도 계속 매달리고 짜증낸다...? 그럼 E Sang Han 사람"
이어서 살사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이어졌다. 선생님들이 시연한 살사가 짜인 루틴인 줄 알았는데, 즉흥적으로 춘 거라고 해서 믿기지 않았다.
"When man steps backward, it's his turn to signal what move he wants the partner to do. When man steps forward, it's woman turn to do the turn."
남녀가 손을 잡고 번갈아 앞뒤로 스텝을 밟으면서, 남자가 한 박자 전 원하는 움직임을 하기 위해 상대 손을 가볍게 당기거나 밀며 신호를 보낸다. 여자는 그 신호를 감지하고, 남자가 앞으로 움직일 때의 미세한 힘을 받아 턴을 수행한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저런 안무가 가능했었다.
들어보니 남녀가 맡아야 할 역할에 비대칭이 있었다. 춤 구성을 만드는 쪽은 남자지만, 남자는 파트너를 돋보이기 위한 역할이 크고 그 안에서 동적으로 움직이며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건 여자였다.
"Man leads, woman follows."
직후 다만 ‘리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따라도 된다’는 말이 재밌게 들리면서, 묘하게 남녀관계를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커플 댄스인데 파트너는 어떻게 정해지는지 궁금했는데, 선생님들을 원으로 둘러싸고 남녀가 교대로 서서 5분 정도 연습한 뒤, 남자가 한 칸씩 이동해 파트너를 교체하는 ‘로테이션’ 방식이었다. "파트너 체인지!"하고 선생님이 신호를 알렸다.
중간 휴식 후 배운 바차타는 살사보다 정적이었고, 앞뒤 대신 손을 잡고 옆으로 움직이며, 살사보다 스킨십이 더 많았다. 하지만 남자의 신호에 여자가 팔로우 한다는 큰 틀은 동일했다.
동아리는 주 두 번 진행되었다. 토요일엔 생일 축하 및 시상 등의 이벤트가 있는 정기연습이 열리고, 월요일엔 배운 내용을 복습하는 시간을 가졌다. 두 기수가 한 레벨로 묶여 수업을 듣고, 각 레벨 2개월 과정이 끝나면 라틴바에서 공연을 올렸다. 의상 컨셉은 공연을 하는 사람들끼리 정했다.
‘3레벨(6개월)’을 마치면 댄클을 졸업한다. 그렇게 졸업한 사람들은 성인을 대상으로 한 라틴 댄스 수업을 계속 듣거나, 후배 기수의 남녀 성비가 맞지 않을 때 헬퍼로 들어오기도 했다.
1교시, 2교시를 나누어 살사와 바차타를 배우며, 끝난 뒤 네다섯 명씩 랜덤으로 나뉘어 뒤풀이가 진행되었다. 뒷풀이가 끝나고 저녁 7시에는 희망자에 한해 수업을 듣던 라틴바에 입장했는데, 이를 '소셜 간다'고 표현했다. 라틴바가 동아리에게 연습 공간을 제공하고 대관비를 할인해 주는 등 동아리를 지원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소셜은 주말이면 7시, 평일이면 월요일 수업이 끝난 직후인 9시에 열렸다. 당연히 소셜은 성인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라틴바에 오는 사람 대부분은 40대였고, 그곳에서 20대는 우리 동아리 사람들 외에는 거의 없었다.
동아리를 하면서, 운영진들이 동아리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고, 동아리를 지속시키기 위해 여러 시스템을 잘 만들어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 주기로 기수가 바뀌는 것부터 시작해, 출석 일수가 부족하거나 실력이 일정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다음 레벨로 올라갈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뒷풀이는 대부분의 경우 랜덤으로 진행되어 동아리 구성원 간의 교류를 자연스럽게 유도했다. 매 기수마다 대여섯 명씩 조가 구성되었으며 같이 사진 찍기, 소풍 가기, 조원들이랑 살사, 바차타 추기 등의 미션이 있었다. 가장 많은 미션을 달성한 조는 상을 주었다. 상은 대부분 라틴바 무료 입장권, 수업 수강 할인권, 카페 상품권 등이었다.
동아리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익명으로 신고할 수 있는 링크가 있었고, 다같이 모이는 시간에 선생님이 이를 공지했다. “잘 좀 씻어라”, “파트너가 거절했는데도 계속 신청하지 마라”, “땀이 많은 사람은 여벌 옷을 준비해달라” 같은 고충이 전달되었다.
정기연습 떈 다양한 이벤트가 있었다. 매주 '‘신선한 가을룩’, ‘크리스마스 룩’ 등 드레스 코드를 지정해 투표를 통해 베스트 드레서를 뽑았다. 할로윈 때는 코스튬을 입고 할로윈 파티를 열고, 크리스마스에는 랜덤 선물 교환식을 진행했다. 춤과 관련된 잭앤질 대회나 장기자랑 이벤트도 있었다.
재밌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신입 부원이 줄어들고 사람들도 빠지자 이런 이벤트들이 점점 유명무실해진 점이 아쉬웠다.
소셜 댄스를 계속 배우면서, 남녀 간에 요구되는 것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다시금 깨달았다. 기본적인 운동 신경은 있다는 가정 하에 남자는 기억력 훈련이었고, 여자는 눈치 훈련이었다.
남자의 경우, 리드할 수 있는 동작이 다양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파트너의 손을 잡고 앞뒤로 움직이며 상대를 회전시킬 경우, 상대 손이 어디에 위치하게 되는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야 했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혼자 연습할 수 없어 더욱 어려웠다. 클래스를 듣고 연습해야지만 그 동작을 할 수 있었다.
반면 여자의 경우 수업을 듣지 않아도 소셜 몇 번 참여하다 보면 웬만한 동작들은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남자들이 리드하는 하는 방식이 여러가지지만, 그 안에서 여자가 할 수 있는 동작은 한정되어 있었다. 여자의 경우 몇가지 턴 중에어 어떤 턴이 요구되는지 알아차리는 게 관건이었고, 그 이상으로 발전하고 싶다면, 주어진 동작 안에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스타일링을 연습하는 것이 중요했다.
소셜도 남자들은 나갈 이유가 적었다. 초보자여서 레퍼토리가 극히 적은 데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성분들과 춤추고 싶은 마음도 적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아는지 몇몇 여성들은 초보자인 거 같으면 몸을 휙돌려 거절하거나 춤추다 조금 실수해도 크게 기분 나쁜 티를 내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거울 앞 "댄클 존"에서 같은 댄클 사람들과 연습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반면 댄클 여자들은 이런 거부감을 크게 느끼지 않는지, 댄클 존과 일반 성인들이 춤추는 공간을 자유롭게 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