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클 동기에 지예라는 얘가 있었다. 밝고 쾌활한 성격이라 주변 공기를 잘 띄워 주었고, 나나 다른 남자들이랑 파트너가 되어 대화 끊기게 되면 상대의 장점을 찾아 칭찬해 주곤 했다.
지예는 나와 파트너가 될 때면 언제나 활짝 웃는 얼굴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처음엔 원래 성격이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유독 내게 다가와 자주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지예와 파트너가 되었을 때 주변을 두리번 거리자, 당황했지만 이내 말을 걸어 관심을 되돌리려는 게, 엄마 같은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지예는 동아리 처음 들어왔을 때도, 댄클 휴강 기간이 끝난 후에도, 유독 나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진 것 같았다. 만약 지예와 사귀게 되면 안정적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점차 나도 먼저 지예에게 말을 걸게 되었다.
얼마 후, 지예가 코로나에 걸려 한동안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지예에게 카톡을 보냈다.
'코로나 때문에 심심해서 어떡해?'
'난 안 심심한데 ㅋㅋㅋ'
'댄클에 안 오는데?'
'코로나인데 어떻게 가?'
'그래서 심심하지 않냐고 ㅋㅋㅋ 뭐하고 보내?'
그 뒤로 답이 없었다. 성급히 판단하기는 이르다고 생각했다. 보내고 나니 카톡을 왜 저런 식으로 보냈지 생각했다. 거기다 다소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주 지예가 댄클에 돌아왔을 때는 내게 뭔가 미안한 표정인 거 같았다. 몸 괜찮냐는 말을 걸자 밝게 대답했고 이전처럼 다정하게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로 돌아갔다.
어느덧 새 기수가 시작되고 4주째가 되고, 레벨 2 공연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제 지예와 따로 만날 약속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말을 워낙 잘 해 위화감이 없었지만, 지예는 중국인 유학생이었다. 소셜 휴식 시간, 지예와 같은 의자에 앉아 쉬게 되었을 때, 교양수업에서 들은 중국어를 짜 맞춰 '우리 같이 밥 먹자'는 말을 중국어로 했다. '우리 나중에 밥 한 끼 하자' 같은 세세한 뉘앙스를 전하는 건 불가능했고, 중의적인 의미가 있어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내가 왜 그래야 돼?"
그 말을 하고 지예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틀 뒤 레벨 2 공연 연습하는 내내, 지예는 나한테 하던 행동을 다른 동기 남자애게 했다. 연습 내내 그 동기 남자 옆에서 말을 걸며,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내가 거는 말에는 대충 대답해 대화를 끝냈다.
지예가 카톡을 읽고도 답을 안 했는데도 여전히 내가 말을 걸고, 사실상 고백 비슷한 것도 했으니, 이제 그렇게 하면 내가 비통해 하며 '너 지금까지 나 좋아헀잖아' 하고 매달릴 거라고 생각했겠지. 실제 그러는 얘들도 있었다. 처음 파트너 남자에게 칭찬을 해 주던 것도, 그런 식으로 호감을 얻으려 했던 거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지금까지 동아리 활동을 하는 동안, 지예가 제일 나에게 말을 많이 걸었 주었다. 내가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건 경우도 적었고, 다른 동기들이 내게 취하는 스탠스는 뭔가 애매한 느낌이 들었다. 안따까운 듯한 눈치도 있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연습에만 집중했다. 레벨 2 공연은 무사히 마쳤고 레벨 3로 올라가게 되었다.
댄클에는 남자친구가 있는, 키도 크고 몸매도 좋은 예쁜 댄클 졸업생이 있었다. 새 기수가 시작되고 레벨 3로 올라가지 수업에 헬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이 떠 올랐다. 연습을 위해 파트너를 찾아야 할 때면 제일 먼저 이 사람에게 달려갔고, 지예는 안 쳐다보고 이 사람만 쳐다봤다.
그 사람이 남자친구가 있던지, 내가 그 사람에게 호감이 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목적은 오직 지예 기분 안 좋게 하는 것. 이런 게 도움될까 싶었지만, 호감 자체가 목적이면 유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너보다 이 사람이 더 예뻐',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리고 꽤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지예는 당황했고,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 보다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그 바람에 발을 삐었는지 남은 클래스 시간 동안은 휴게실에서 쉬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다소 당황했다. 지예가 이렇게까지 큰 반응을 보일거란 예상은 못 했다. 지금 이 상황만 봐서는 일방적으로 내가 잘못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날 수업이 끝나고 나면 지예가 내 뒷담화를 심하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후 아무 일 없었고, 댄클에 8개월 더 다닐 동안 지예와 마주칠 때 인사하고 별일없이 지낸 거 보면 지예가 성격 좋은 건 맞는 거 같았다. 단지 내가 이성적 대상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지예와 잘 안 됐어도 납득이 되는 게, 초반 지예가 아닌 슈가에게 관심이 있던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지예가 저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닐까. 나는 사귀게 된다면 정말로 진지하게 사귈 생각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러고 나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다른 얘들이라고 안 그럴까. 1년 동안 스무 커플이나 생겼다고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중 절반 이상이 한 달 내에 깨졌다고 들었다. 이미 사귀고 있는 커플들도 내가 생각하는 진지한 관계가 아닐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면서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랐다. 보통 연애하고 아무리 늦어도 3개월 사귀게 되면 관계를 맺게 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좋아하니까 사귀었을 테니까. 이게 현대 연애의 새로운 균형이었던 것이다. 아니면 예전부터 그랬던 건가?
그 후 댄클에서의 내 생활은 이랬다. ‘나도 더 이상 거리낄 게 뭐 있어’ 싶어서, 내가 조금이라도 호감이 생기는 사람 모두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이전과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전까지 내성적인 탓에, 정말 관심 있는 이성에게만 억지로 먼저 다가갔다면, 이제는 모두에게 먼저 말을 걸고 친해지려 했다. 남녀 불구하고 상대를 칭찬하고 호감을 얻으려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같이 수업을 듣던 몇몇 남자애들이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게 되었다. 말을 걸어도 제대로 답해주지 않거나,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딴지를 걸었다. 우리 기수 레벨 3 공연을 마치고 다른 사람들을 모아 뒷풀이를 한 것 같은데, 나만 빠진 거 같았다. 오해였다고 하는데…
몇몇 여자애들도 마찬가지였다. 별일도 없었는데 소셜 때 파트너 신청을 거절했다.
얼마 후 이번에는 우리 기수끼리 다같이 뒷풀이 하자고 파티룸을 잡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다같이 뭉치는 느낌도 아니여서 분위기가 애매했던 걸로 기억한다.
한편 지예가 했던 말은 남녀관계의 핵심을 뚫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지예뿐 아니라 대부분 여자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생략된 말의 전체 버전은 다음과 같지 않을까.
"너랑 사귀지 않으면 게속해서 남자들의 대시와 호의를 받을텐데, 내가 왜 굳이 너와 사귀어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