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점은,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믿지만, 사실 우리의 행동과 판단 대부분은 무의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인간은 주변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는 존재였다. 이 사실은 내게 크게 다가왔다. 나는 스스로를 매우 이성적이고 통제된 사람이라고 믿었다. 공대 공부를 좋아했고, 어떤 선택을 내릴 때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두세 번씩 고민하곤 했다.

 

하지만 내가 이성적이라 믿었던 사고는 실제로 부정적으로 편향되어 있었다. 선택을 하기 전에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태도는 새로운 도전을 회피하게 만들었다. 또한,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바탕으로 이성적 판단을 내린다는 생각은 좋은 일이 생기면 모든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부정적 사건이 발생한 날이면 ‘전부 탓’이라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험해 보지 않은 일에서 최선의 선택을 내린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리학을 배우며 인간은 원래 환경에 크게 좌우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정적 사건이 발생했을 , 이를 전부 탓으로 돌리는 대신, “이런 환경과 상황 속에서 내가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구나” 받아들일 있게 되었다. 판단과 주변 환경의 영향을 분리할 알게 되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도 나보다 나을 없고, 또한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행동하는 인간일 뿐이었다.

 

또한, 새로운 시도를 통해 기대하지 못했던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택의 순간에는 알지 못하는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경험을 통해서만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있다는 점을 배웠다. 어렵고 위험부담이 크다고 생각했던 일들 속에도 소소한 행복이 숨어 있다는 점도 깨달았다.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지나치게 숙고하는 태도는, 화가 났을 때도 감정을 억누르며 표현해도 되는지 고민하다가 결국 화를 내야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게 만들었다. 나는 이런 태도가 이성적이라고 믿었지만, 사실 그것이 오히려 나를 만만하게 보이게 하는 원인이었다

 

문학, 영화, 소설 같은 예술 작품 속 감정을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으로만 보았다. 이유 없이 맺어진 관계와 계산 없이 부딪히는 감정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화심리학을 배우면서 감정이란 단순히 자신과 타인에게 현재 필요한 것을 알리는 신호일 뿐이라는 깨달았다. 배고픔과 졸림 같은 본능적인 신호와 다를 없었던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이 인간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생물의 기본 목적이 생존과 번식이기 때문이다. 번식은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는 생존의 연장선이다.현대에 이르러 기본적인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서, 드라마와 광고부터 인간의 노력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이 성적 욕구에 기반하고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나는 외로움을 극복한 사람이라고 믿었지만, 외로움도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필수적인 인간의 욕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서 발전해 온 이유는 동굴 시대부터 집단생활을 통해 생존해왔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는 사회 발전의 원천이었다.

나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같은 이야기를 보면서 외로움이 해소되었고, 그래서 외로움을 극복한 사람이라고 착각했었다. 그러나 뇌는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실제 경험이든 상상이든, 심지어 간접 경험이든 간에 뇌는 동일한 반응을 일으킨다.

 

심리학을 배우고 나니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의 고유한 특징이고, 나만의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게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경험조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리학만큼 인생에 영향을 학문이 있을까? 심리학은 자신과 주변의 경계를 알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 필수적인 학문이다. 심리학을 배우기 전의 나처럼, 자신이 이런 행동을 했는지도 모른 단지 스스로를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어떤 충동에 의해 자신이 움직였는지 인식하지 못한 말이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타고 태어나는 성향이 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선호하는 것은 다르다. 선천적 장님도 웃을 줄 안다. 인간은 뱀과 높은 곳에 대해 기본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다. 유전적으로 이러한 행동을 하도록 편향된 사람들이 더 오래 살고 번식 기회도 많이 가지게 되어 이러한 성향은 유지된다.

 

이 책은 이성에 대한 선호 역시 남녀 각자의 적응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형성되었다고 설명한다. 현대에 들어서 문화도 변하고 피임법도 많이 발달했지만, 인간이 동굴에 살던 시절 몇 천 년에 걸쳐 형성된 성향들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남녀가 직면한 적응적 문제는 다르다.

 

남자 적응적 문제는 건강한 자식을 남기는 것과 부성불확실이다. 영장류  배란이 은폐된  인간 여성 밖에 없다. 영장류 중 배란이 은폐된 것은 인간 여성뿐이다. 가임기 순간에 다른 남자가 들어와 관계를 맺어 여태껏 다른 자식을 길렀더라면 피해가 막심하다. 또한 여성의 번식 능력은 나이가 들수록 떨어지기 때문에, 남성은 어리고 건강하며 처녀성 또는 정절 같은 성격적 특성을 지닌 여성을 선호한다.

 

젊음과 건강을 나타내는 지표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머릿결, 피부 탄력, 얼굴 대칭 정도 등 다양한 지표가 있지만, 이 중 특히 중요한 것은 허리 대 골반 비율이다. 이는 여성의 번식 능력을 나타내는 신뢰성 있는 지표로, 문화와 시대에 관계없이 남자들은 허리 대 골반 비율이 0.7 정도인 여성을 매력적으로 느낀다.

 

이와 달리 여성은 자신의 몸으로 자식을 낳기 때문에 자식이 자신의 자녀임을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성적 투자를 많이 하는 쪽은 여성이기에, 번의 관계로 인해 다른 짝짓기 기회가 완전히 봉쇄된 9개월 동안 의무적인 투자를 하게 있다. 여성의 적응적 문제는 자식을 낳았을 남자가 자원을 충분히 지원해줄 능력이 있는지, 그리고 그럴 의향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여성의 성적 선호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만 가장 요인은 경제력이다. 문화에 상관없이 세계적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결혼 상대자의 경제적 자원을 원한다. 이는 여성이 충분한 자원을 지니고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문화를 막론하고 나이가 들수록 사회적 지위와 자산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기에,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성을 선호한다. 자존감이 높은 것(안정성), 헌신, 신뢰성 같은 성격적 특성도 중요하다. 자원을 가져다줄 능력이 있어도 쉽게 잃어버리거나, 다른 여성에게 흘러갈 경우 의미 없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번식은 생존의 연장인 만큼 모든 생물에게 주요 문제이며, 여성은 아이를 기르기 위해 직접적인 보호를 비롯한 생존 자원(남성) 필요하고, 남성은 번식 자체를 위해 성적 자원(여성)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남녀의 선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396쪽에 요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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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 남녀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젊고 건강하고 매력적인 여성들은 나이 많고 자원이 넘치는 배우자에 대한 그들의 욕망을 충실히 이행해서 나이 많은 여성의 남편이 되었을지도 모를 남성들을 독차지한다. 지위와 자원을 지닌 남성들은 젊고 건강하고 매력적인 여성에 대한 그들의 선호를 실행하려 한다. 그리고 자원을 가진 남성에 대한 조상 여성의 선호가 더 심한 남성 간의 경쟁과 위험 부담을 낳는 선택압을 만들어 냈으므로, 남성은 여성보다 더 빨리 사망하며 결국 남성의 희소성은 더 악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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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휴학 2학기 차, 대학에 들어오고 3년이 지났다. 부모님께는  학기 동안 전공 공부가 어려워 이해가 안 되니 부족한 부분을 공부하겠다고 한다고 했다. 변명에 가까웠지만 아예 안 한 것도 아니었다.

 

현실(미래?) 대한 걱정은 그다지 없었다. 같은 지역에 대기업의 월급과 워라밸이 보장된 걸로 유명한 일본계 자동차 회사가 있었는데,  일본어 자격증(N1)과 꽤 높은 영어 점수가 있어서 쉽게  회사에 취직할  있을거라고 학과장님이 면담  말씀했다. 같은 지역에 있던  회사는 대기업 월급인데 워라벨 보장된다고 유명했고 우리 대학에서 할당된 인원을 뽑아야 했기 때문에 N2 일본어 자격증이 있으면 거의 확실히 입사할  있다고 소문이 났었다. 지방대에서 전자공학과면서 일본어를 자격증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내 인생 이렇게 흘러가는 대로 둬도 되는건가 의문의 있으면서도 그래도 마지막으로 기댈 곳이 있다는 게 안심되었다.

 

또 이 때 엄마가  대형 tv를 사고 처음으로 유선 방송도 연결했다. 대형 TV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나온다는 게 신기해서 자주 켜게 됐고 토크쇼 예능과 관찰 방송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비정상회담과 썰전, 라디오스타를 좋아했다. 음악방송을 즐겨보지는 않았지만, 아이돌들이 하는 예능은 좋아했다. 좋아하는 아이돌은 오마이걸, 브이앱도 자주 볼 정도로 빠졌었다.

그러고 나니 연예계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 예쁘고 멋진 사람들이  곳에 음악방송 때마다 공연하고 춤추는.. 각자 자기 매력을 뽐낸다. 브이로그에선 자신의 긍정적 성격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예능, 이게 가장 부러웠다. 촬영이라곤 하지만 저렇게 다양한 사람들끼리 모이고, 제작진이 만든 어느 정도 재밌을 거라고 보장된 이벤트가 있다. 저렇게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상이 있다면 저곳이 현실세계의 이상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빛나는 이상과 달리 현실의 나는 초라했다. 누룽지를 먹다가 이 깨졌다. 신경까지 드러났는지, 어쩌다 음식물이 깨진 이 사이로 들어가면 너무 아팠다. 서울에서 치과를 개원한 삼촌이 지방에 내려오게 되어 검사해줬는데, 썩은 이가 한,두개가 아니란 걸 꺠달았다. 충치가 7~8개에 신경치료 해야될   개… 안 아파서 몰랐었다. 치료비도  백만원   같으니 주기적으로 서울로 올라와 (ktx 3시간 거리..) 삼촌 치과에서 치료를 받으라 했다. 스트레스 받으면 와인이나 커피를 마시고 정신이 소모되어 잠에 빠질 때까지 한탄을 반복한 탓에 이렇게 썩은 것이었다.

 

그렇게  학기가 지나갔다. 난 휴학 1년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린건가? 미칠  같았다. 3년 반을 제자리 걸음하는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건 뭘까? 이대로 아무 것에도 제대로 노력하지 않은 채 취직하고 결혼하고 살면 되나?

빛나고 싶다. 테레비에 나오는 연예인들처럼. 이대로 아무것도 없는 대학생활 보내다 취업해서 결혼하고 살고 싶지 않다.

일단 서울로 올라가면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뭐든 좋았다. 단지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다. 시간이 정체된 내 감옥같은 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뭐라도 해야됐다.

 

원룸 후보를 고르고 부모님께 한 학기 동안 서울에서 알바하며 자취하겠다고 했다.

반대했다. 당연했다. 이미 1년 휴학을 했는데 한 학기 또 휴학하며 이번엔 서울에서 혼자 지내겠다니. 이번엔 뭘 하겠다는 계획조차 없었다. 단지 새로운 환경에서 지내보고 싶다는 것 뿐…

하지만 1주일 간 의논 끝에 서울에 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어차피 삼촌 치과에서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했기 때문인가 서울에 있으면서 2~3 간격으로 통원하라고 했다. 3   정체된  인생이 풀릴  같아 희망이 보였다.

동생이 다니는 서강대 근처, 신촌에 있는 한 고시텔에서 살게 됐다. 내 생각한 (신림)보다 월세가 15만원 비싸지만 부모님이 내줄테니 동생 근처에서 살라고 했다. 이것 만큼은 감사함을 느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에서 서울에 있는 최대 3개월 동안은 열심히 살자고 결심했다.

 

내가  게스트 하우스는 신촌대로 바로  길에 있었다. 젊음과 활기가 넘쳐났다.  인생 이렇게 많은 청춘들을  적이 있었는가. 내가 사는 곳은 한적해서 좋지만  또래를  일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대학교  번화가도 발달된 편이 아니었고. 학교 축제  많은 사람들이 모이긴 했지만, 그것과 다른 느낌이 들었다. 단지 몰려 있는  아리나 커플들과 친구들이 2~4  담소를 나누며 지나가는  산뜻하고 평화로운 느낌이 들었다. 신촌대로 노란색  줄 조명으로 장식되어 따뜻한 노란색 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 빛나고 있었구나 생각했다. 과 생기와 에너지가 넘치는 거리. 초라했 나는 그걸 모르고 있었다.

알바를 구하고 보컬 학원과 함께 취미인 피아노 학원을 등록하고, 며칠 간격으로 삼촌의 치과에 다녔다. 꼬박   동안 2,3 간격으로 치과에 통학하면서 자신의 한심함을 느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관리를 소홀히 해선  된다. 자신이 한심하고 우울하다고 기본적인 건강관리조차  하면, 이는  다시 도미노처럼 다른 나쁜 일을 불러온다.

 

그리고  달이 지났다. 아쉽게도 노래에 재능 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말을 거의  해서 노래는 투자한 시간에 비해 실력이 거의 늘지 않았다. 서울 처음 올라왔을 때는 모든  잘될  같이 희망적이었지만,  달이 지나니 역시 익숙해지고  자신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알바, 피아노&보컬 학원, 헬스장만 반복적으로 다닐 ,  이상의 뭔가를  찾았다. 공간이 서울로만 바뀌었을 ... 나는 여기서 뭐하는 것일까. 활기 넘치는 밖과 달리 원룸텔은 너무 조용했다.

 

야간 알바를 하고 나온 어느  아침 8. 집으로 돌아가면서 보는 아침의 신촌거리는 새로웠다. 저녁에는 데이트 장소, 버스킹 장소, 학생들의 유흥거리였던 장소가 아침이면 통학로로 바뀌는 것이었다. 밤엔 정처없이 무작위로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아침에는 목적을 가지고  방향으로 대로를 따라 학교로 나가고 있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뭔지 생각했다.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가능성이 일말이라도 있으면 시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왔지만 한낱 도피 뿐이었을까.

사실 연예인이 되고 싶은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이 지루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떠오른게 내게 그것밖에 없었다.

예쁘고 멋진 사람들이, 청춘을 즐기는 세계. 밝고 화려한 현실이  현실과 대비되어서 좋았지만.. 이미 많이 늦었을지도 모른다.

 

지방대생 특채로 들어가 좋은 직장에 들어가 편하게   있었는데,  길을 포기하고   원하는 것일까.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학창시절 험담 시작되기 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인간관계 원만히 해내 걱정없이 공부하고, 애니나 방송에서 보던 청춘을 나도 즐기고 싶었다. 친구들과 여행도 가고, 연애도 하고, 20대를 후회없이 즐기고 싶었다.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순간 어디선가 들었던 편입이란  떠올랐다. 혹시나 싶은 생각으로 조사해 보니 수능과 달리 편입은 영어와 공학수학으로 시험을 본다고 한다. 당시 9 초반으로 편입하기엔 학교에 따라 한달에서   남은 상황이였다. 하지만 영어는 잘하는 편이고 편입수학은 수능수학과 달리 암기 위주의 문제라고 해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영어성적만 요구하는 곳도 있었다.

그렇게 신촌에 오고 6주차, 편입을 결심했다. 목표를 정했으니  이상 신촌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본가에 내려가 학교 도서실에서 편입수학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공부했다. 이렇게 한가지 목표에 진심으로 몰두하는 게 얼마만인가..?

그리고 편입 시험 당일. 그랬어도 시간은 부족해서 공학수학 이론만 익히고 문제는 많이 풀지 못한 상황이었다. 편입 수학은 어렵지는 않지만 외워야  공식이 많아 즉각 떠오르지 않으면 시간 내에 풀지 못 한 다는 게 특징인데... 수학 성적은 당연히 낮을  생각하고 영어성적을 믿을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합격 팔표. 역시나 원서를 넣은 다섯군데 중 네군데는 불합격이었다. 남은 한 곳은 TOEIC 성적과 면접만이 평가 기준이었다.

1차 합격자 발표. 합격자 명단에 없었다. 2차 합격자. 여전히 불합격이었다.

아직 3차 발표가 남아있었다. 기존 합격자가 등록하지 않을 경우 자리가 생기는. 간절히 기도했다. 여기서 떨어지면 또 그 지루한 집에 박혀있게 된다. 하지만 추가 합격인 3차 발표에 결국 합격 통지를 받을 수 있었다. 'TOEIC 970점으로 지원했는데 3차 합격이야?'란 생각이 들긴했다.

 

결국 내가 찾지 않았을 뿐, 항상 기회는 내 곁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어 실력은 항상 있었으니 언제든지 지원만 하면 됐다.

편입에 성공하고 개학까지 남은 두달 정도, 부족했던 전공 공부를 보충했다. 편입수학을 공부하고 나니 이전엔  생략했던 유도과정들이 이해가 되고 전공공부가  쉬워졌다. 그리고 편입  학기, 전공 5과목을 수강하고 평균 평점 A를 받았다.

 

그렇게 암흑기 4년간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렇게 행복한 삶이 시작되면 좋았겠지만...  뒤로도 여러 문제 때문에 또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한다. 당연한 게 장장 4년간 거의 집에만 있었던 것이다.

주변이 너무 시끄러웠다. 엄마는 재수하라며 며칠간 소리쳤고 진학 대학을 물어본 선생님들 얼굴엔 의외란 표정에 스쳤다. 실망보다는 '생각보다 별거없었네'란 표졍.

그래도 괜찮았다. 빨리  시끄러운 소에서 벗어나 싶었다. 싫어도 모두가 모여있어야 하는  갑옥에서 벗어나 혼자 있는 곳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었다.

집 근처 대학을 신청했다. 학비도 사실상 무료 통학거리도 15 남짓. 부모님의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일본어 재능을 살려서 일본 유학 준비를 한다고 했. 단지 변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 고등학교에서 벗어낫으니 대학생 데뷔해서 다시 시작한다는  꿈도   없었다. 그간 경험은 나를 너무 이상하게 변화시켰다. 소곤거리는 소리는 모두  험담으로 들리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선 위축되었으며 사람들을 쳐다볼  눈을  곳이 없어 시선이 부유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의식되면 표정을 어떻게   몰라 얼굴이   강하게 찡그리는 표정으로 경련했다.

 밖에 나가는  최소화하고 대학에서도 업만 듣고 집에 와서 내가 좋아하던 애니를 봤다. 원래도 애니 보는  미였지만 하루 종일 볼 정도로 더욱 졌다. 애니는 이제 단순한 취미 이상으로 현실의 더러운 건 어디에도 없는 이상적인 세계 나타낸 것이었다… 내가 원하던 이상적인 소속감과 유대감을 애니를 통해 만족했다.

1학년 1학기가 끝나면서 하나둘 군대를 떠나기 시작했지만, 지금 갔다가는 버틸  없을  같았다. 최소한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을 정도가 됐을  가고 싶었다.

그래도 사람들과의 교류는 완전히 끊을  없었다. 학교 수업, 편의점 계산원, 하물며 길을 지나가며 마주치는 사람들.  이상한 행동을 인식하고 나면 이를 알아차리고 일부러 무시하는 행동을 하는  같았다. 주변을 과하게 의식하는  행동이 이런 일들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칠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날이면  12시에 커피나 술을 마시며 울분을 토해내듯 온갖 생각을 일기를 적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12시가 되면 부모님도 잠에 들고 집에는 적막함이 돌았다. 낮에는 애니를 보는 등으로 불쾌한 기억으로부터 주의를 분산시켰기 때문에 지금 떠오르는 것이리라.

오늘 나의 잘못된 행동 뿐만 아니라 학창시절 기억 모두가 떠올랐다. 오늘 사건은 오늘  행동  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과연 잘못된 행동이란 표현조차 맞는건가?

과거 기억을 계속 떠올리는 것은 뇌가 과거 아픈 기억을 처리하려는 노력이라고 하지만  년이 지나도 심해질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습관 탓에 나중에 충치가 (아주 많이...) 생기게 된다.

 

그러다 어느날 진심으로 이 세계에서 빠져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간절하게 원하면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이 만들어  이야기지만 진짜 사람처럼 느껴지는 이런 교류가 순전히 작가 머릿속에 나왔다고 생각할  없었다. 사실 이런 세계가 어디간에 존재하고, 그런 단편들을 작가들이 수신해서 그려내는  뿐이 아닐까. 애니를 보고선 누워서 내가  세계에 간절히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하는  반복했다. 며칠 정도 시도 후에 안 된다는 걸 꺠달았다.

그 일이 있은 후 애니를 봐도 재미 하나도 없었다. 애니를 봐도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패턴대로 행동할 뿐 이전처럼 어디엔가 존재하는 진짜 사람의 이야기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결국 현실에서 사는 인간이라는  깨달았다.

그리고 나서 유투브에서 일반 교양 강의를 보거나, 철학책을 읽는  잡다한 지식을 얻는  자체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게 그나마 20 초반 방구석 생활하며 제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느덧 3학년 1학기가 되고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외롭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애니와 책으로만 인간을 접하는  아닌 내가 살아있는 동안 진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얼굴 경련이나 시선이 부유하는 면도 없어지게 되었다. 시간이 약인 법인가... 내가 그렇게도 혐오하는 인간과 관련되고 싶다고 다시 생각할 줄이야. 하지만 그렇기엔 2 동안 혼자 방안에서 보낸 시간은 너무 길었다.

 

여행 동아리를 들었다. 인원 15 정도의 소규모 동아리였다. 동아리에서 배드민턴, 보드게임, 축제  닭꼬치를 파는 등의 활동을 했다. 사람들이 걸어주는 말에 수동적으로 답할 뿐이었지만 그래도 사람 접하는  자체가 스트레스였던 20 때에 비해 많은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 동아리가 원래 그런지 첫 동아리 여행(1박 2일의 MT로 대체) 갔다  이후 동방에는 사람들이 점점 뜸해지고 활동이 거의 없어졌다. 모였을  대화하는 것 이상으로 개별 사람들과 친해질 방법을 몰랐던 나였고, 동아리 활동이 없어지니 내 주변에는 다시 적막감이 감돌았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뭐가 문제일까.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아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납득이 안 되었다. 원래라면 이과면서 영어와 일본어를 잘하는 촉망받는 학생이었는데, 그런 꿈과 희망이 넘쳤던 내가 이렇게 됐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노력하는 것도 없이 되는대로 살며 일상을 보내는... 과거의 나는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 상상도 못 했겠지.

다시 수능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시 8월이었고 수능까지 3개월 남았어서 진짜로 합격하고 싶단 생각보단 도피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부모님은 내가 휴학하고 수능 준비하고 싶다고 하니 언뜻 환영하는 같기도 했다.

 

하지만 공부는  되지 않았다. 애초에 도피였던 탓인가. 책상에 앉으면 적막이 감돌고 다시 과거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문제집을 보고 있으면 벌써 3  학교에서 앉아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과거 행동들, 험담들, 사람들의 반응들,   이렇게  , 이렇게 하는  해답이었나. 끊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어 문제집에 집중을 하지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집중 못하는 나를 한탄했다. 미칠 것 같았다. 동아리 들 정도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3년이 지났음에도 결국 과거 기억으로부터 전혀  벗어난 것인가.

 

과거 기억이  떠오르고 컨디션이 좋았을 때도 수능 공부 자체도 어렵게 느꼈진 . 그간 실패가 뭔가 거대한 콤플렉스를 형성해 방해하는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때마다 회피하듯 수능공부는 안하고 다른데서 원인을 찾았다. 왜 이렇게 집중이 안 되는지, 내가 공부를 진짜 못하는 건지, 천재가 있다면 뭐가 다른 건지. 그러면서 이 때 '아인슈타인과 문워킹' 책과 전문성의 심리학을 접하게 된다. 가치관이 바뀌어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결국 수능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3개월을 보내고 수능 당일 성적은 당연히 안 좋았다.

 

그리고 다시 막대한 후회가 몰려왔다. 3개월 준비하고  되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1 수능 준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공부하면서  온갖 생각을 1년간 더 버텨내야 한다니... 너무 아득했다. 집에서 공부 하는 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재수학원에 들어간다고 해도 제대로 집중할 수 있을까 걱정됐다. 그리고 그렇게 수능을 1년  준비했는데 아무것도 안 없으면 진짜로 내 인생은 끝나는 거 같았다.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단순 가십거리로 험담을 퍼부은 얘들은 지들끼리 모여 또 대학생활 하겠지. 자기들 평생 평가하는 위치에 있 것처럼 타인의 행동을 소재거리로 욕하면서 대학생활을 보내겠지.

고등학교 2학년, 외고에서 일본어랑 영어 잘하고 국어,수학 점차 늘고 있는 (평균 3등급에서 2등급으로) 촉망받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2학년 떄 그 일 이후 성적은 떨어질 뿐이었다. 공부엔 집중이 안 되고 머릿속엔 감옥같은 이 기숙사 학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들이 너무 밉고, 원망스럽고, 미웠지만 결국 그걸 벗어나지 못한 내 탓이라는 결론으로 끝났다. 누군가 나를 도와줬으면 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더욱 짜증난  이런 후회와 한탄이 밀려오는  한번도 아니었다.  때마다 이런 감정을 글로 배설해내다 잠에 빠졌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런 행동만 수년  반복하고 있다.

 

... 어쩌겠나? 벗어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곤 다음  아침이 되고 다시 애니를 보거나 책을 읽겠지.

 

애니는 10대 중반에서 20대 초반까지, 한때는 내 삶의 목표였을 정도로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처음 만화에 관심을 가진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당시에는 애니보다는 만화책을 많이 봤다. 애니를 보는 것보다 만화를 읽는 게 시간이 절약된다고 느꼈고, 한국어 더빙은 내 뇌 속의 캐릭터 목소리와 달라 오히려 어색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만화카페가 아니라 만화책 대여방이 있어, 한 번에 5권 정도 빌려와 집에서 일주일 동안 읽곤 했다.

당시 좋아했던 만화책은 이누야샤, 샤먼킹, 유희왕, 갓슈벨, 나루토 등으로 대부분 또래들이 읽는 판타지 계열이었다. 이때는 단지 또래들이 좋아하는 정도로만 좋아했어서 만화를 취미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또한, 일본 만화가 야한 게 많다는 것을 알게 되어 찾아보기도 했는데, 당시 에어기어라는 만화가 정말 야하게 느껴졌다.

 

본격적으로 애니를 좋아하게 중학생 , 영어학원을 같이 다니던 친구를 만나고 나서였다. 당시 옆에 앉았던 친구가 수업 10분의 중간 휴식 시간마다 MP3(음악과 영상 재생만 가능한 기기) 저장한 애니를 봤다. 옆에서 힐끗힐끗 보고 있었더니 이어폰 한쪽을 나눠주었고 그렇게 애와 친구가 되었다.

 

처음 일본 애니는 신세계 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만화 캐릭터의 목소리와 현실 사람의 목소리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선입견과 달리, 성우가 연기하는 목소리는 정말로 캐릭터의 목소리 같았다. 정말로 그 캐릭터가 살아있는 것 같았다.

목소리에 이렇게 풍부하고 다양한 감정 표현이 들어갈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한국어 음절은 딱딱 끊어져 있어 감정을 싣기 어려운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으로 만화가 진짜 현실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쉬는 시간마다 럭키 스타, 작안의 샤나, 스쿨데이즈 (충격과 공포…) 등의 애니를 같이 보면서 나도 본격적으로 애니를 좋아하고 찾아보기 시작했다.

 

당시 가장 좋아했던 애니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었다. 한 고등학교에서 초능력자, 미래인, 우주인이 평범한 주인공과 함께 특별한 능력을 가진 여자아이를 들키지 않게 보조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여자아이는 자신은 의식하지 하지만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무의식적 짜증이나 소망이 현실로 구현되기 때문에, 그 뒷처리를 하거나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게 주인공의 역할이었다.

당시  설정이  이렇게 재밌었는지 모르겠다. 완전히 판타지적인 이야기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보였고, 비현실적인 요소들이 들키지 않고 현실 세계에 공존해야 한다는 매력적이었나. 당시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반복되던 일상은 너무 지루했다.

다른 사람에게 추천한다고 생각하면 호불호가 크게 갈린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며 단순히 취미로 여겼던 애니는 어느덧 내게 단순 오락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애니에서 표현되는 이야기들은 현실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이상 세계처럼 느껴졌다.

서로 배려하고, 서로를 지지하며, 서로 도와주는 이상적인 관계의 세계. 당시 에어, 클라나드, 카논 등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은 너무 따뜻했다. 현실도 애니 세계처럼 행복과 상냥함으로 가득 차는 것이 인간이 지향해야 목표가 아닐까?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학생들 사이에서 가십과 험담의 대상이 되면서 그런 이상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학생이 되고 어느 , 정말 내가 좋아하는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간절히 원하면 되지 않을까? 사람이 만들어 이야기지만 진짜 사람처럼 느껴지는 이런 교류가 단순히 작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사실 어디엔가 이런 세계가 존재하고, 작가들은 단편들을 수신해 그려낸 것뿐이 아닐까. 당시 방구석 폐인 생활을 오래  탓이리라. 이틀 동안 하루 종일 누워 내가 저기에 있다고 생각하다가 결국 불가능하다는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이상 애니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좋든 싫든 나는 가상세계가 아닌 현실세계의 주민이었다. 애니 캐릭터들은 단지 그림 인간일 뿐이었고,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었다.

그러면서 점차 진짜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원하게 되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좋은 일과 나쁜 일들은 내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세계에 참여하고 있는 대가였다.

애니는 나중에 40대가 되어서도 다시 있었다. 이후로 애니를 거의 보지 않게 되었다.

보충역으로 3주간 훈련소에 갔다 왔다. 훈련소에 있는 동안 군대와 병사에 관해 생각했다. 지낼수록 훈련소에서 받는 기초군사훈련은 전시 상황 때의 생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단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유투브에서 본 감옥 생활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훈련소에서는 제식 훈련을 가장 먼저 받았다. 제식은 열중쉬어, 차렷, 세워총 등 어떤 때에도 정해진 동작만을 취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여러 사람이 긴장하지 않고 있으면 산만해지고 통제가 어렵기 때문이다. 걸을 때 오와 열을 맞추고 발을 맞추어 걷는 것은 인원 파악을 하고 앞사람의 발을 밟아 넘어지지 않기 위한 것이다.

 

훈련소에서는 시간을 엄격하게 지켜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이니 인원이 많아 제한된 시설을 돌려 써야 해서 하루에 샤워는 한 번만 할 수 있었다. 도망치면 안 되기에 매 시간마다 인원 파악을 했다. 또 생활관(숙소) 내에서도 대기 상태 중에는, 명령을 기다리는 도중이므로 가만히 있는 것 외에 다른 행동을 하면 안 됐다.

 

훈련소 생활 중에는 밖에 돌아다닐 수도 없기 때문에 하루 종일 생활관 자기 침대에만 있어야 했다. 책을 가져갔으나 의자 없이 침대에 앉아 있어야 해서 불편했고 텔레비전 소리, 동기들 떠드는 소리 등의 소음으로 집중하기 어려웠다.

 

무슨 명령이 떨어질지 모르기에 방송에는 항상 귀 기울이고 있어야 했고 못 들으면 혼났다. 그렇다 해도 급한 화장실이나 상급자의 호출로 전달 사항을 못 받은 사람이 한두 명 생길 수밖에 없어 같은 숙소(생활관) 사람들이 집단 책임을 가지고 이런 사람들을 챙겨줘야 했다.

 

하지만 의외도 급식과 간식은 잘 나왔다. 한때 군대 급식 부실 논란 때문인지 고기(제육, 고기 미역국, 돈가스 등)가 잘 나왔으며 프링글스, 쿠크다스 한 박스 등 과자와 음료수도 평일에 하나씩 지급되었다. 생활관 사람들은 긴장 상태로 지내고, 다른 즐길 거리가 없어 먹을 것에 길들여진 가축 생활을 한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짜증 나는 부분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가 났던 것은 화내는 것이 목적이라는 듯이 매 순간 소리치는 분대장이었다. 그 분대장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 나아 보이는 사람 모두에게 소리를 지르고 명령할 수 있다는 것으로 자기 우월감을 만족하는 듯 보였다. 어느 곳이나 이런 사람 한두 명 있기 마련이지만 상관 명령은 절대적인 군대 안이라는 상황 때문에 크게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게 화가 났다. 또한 반말로 명령하는 환경이다 보니 PX 아주머니나 방문한 사진사도 병사들에게 명령조로 말하거나 자기 불평을 병사한테 토로했다. 반면에 이런 환경인데도 여전히 잘못한 것 외에는 크게 소리치지 않는 분대장들도 있는 것을 보면 인간 본성이라는 건 확실히 있고 쉽게 변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행군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훈련이었다. 20km를 걷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궁금했다. 운동을 좋아해서 쉬울 줄 알았으나 근육량과 관계없이 사람의 내구도는 비슷했다. 무거운 배낭과 총기를 한쪽 어깨에 메고 걸어 어깨를 파고드는 듯한 통증이 들었다. 자세만 나빠지고 정신력과 체력만 빼는 이걸 왜 하는지 의문이었는데 전투 중 산악지역 등을 이동해야 할 경우 결국 도보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군대 훈련이라는 게 전쟁 발발 시 겪을 고생을 한번이라도 미리 겪어 익숙해지라는 거라고 깨달았다.

 

전쟁이 나면 목숨을 걸고 가장 직접 나가서 싸우는 병사이니 어떤 부사관보다도 애국심과 소명 의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귀중한 전력이니 한 명도 도망치면 안 되고, 계속 긴장 상태로 있어야 되고, 다수 인원이 소수의 시설을 돌려 써야 하므로 자유도 제한되고, 항상 명령을 기다리는 긴장 상태에 있는 이러한 괴리가 병사는 소모품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한다. 하지만 그런 소명 의식이 있었다면 애초에 부사관에 지원해야 했고, 결국 누군가는 이런 병사를 맡아야 한다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보충역이었기에 3주 훈련이 끝나고 사회로 돌아가게 되었다. 반면 현역들은 훈련이 2  더 진행되고 끝난 후 자대로 배치된다. 자대에 배치되면 이러한 생활이 나아진다고 들었지만, 결국 가장 힘든 건 내 의지와 상관없이 1년 반이라는 기간 동안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군대는 좆 같지만, 지게 되면 인권이 유린되는 전쟁은 더 좆 같은 거고, 그렇기에 전쟁을 대비하는 이러한 불편함을 대신 감수하는 게 군인이라는 직업이었다. 그리고 한국에선 현역은 말 그대로 1년 반 동안 군인이란 직업을 하는 것이었다.

 

진심으로 대한민국에서 복무하는 모든 군인들을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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