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후 단 하루도 지연이를 안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내 삶의 동기가 되었다. 코로나 심화로 인한 거리두기가 시작되고 모든 모임이 스탑된 겸 한동안 스터디 카페에 박혀 살았는데 힘들 때마다 새로 뜬 지연이 인스타 게시물이 삶의 낙이 되었다. 왜 이렇게 귀여울까. 딸 낳은 아빠가 이렇지 않을까. 
그동안 진짜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시도한 것도 많았고, 노력한 것도 많았다. 썸 등 인간관계의 현실에 대해서 깨닫고. 경제적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게 얼마나 힘든 건지도 알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지연이와의 시간은 더 빛을 발하고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차릴 뿐이었다. 보고 싶다. 그럴 때마다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답해도 이상해지 않을 인스타 질문에 두 번 정도 답했고, 한 번 지연이를 연상시키는 것 같아 귀여운 동물 사진을 보내거나 새벽에 고백의 전 단계 비슷한 문자를 보내 보았다. 그럴 때마다 지연이는 내가 보낸 내용과 뭔가가 연관된 게시물을 스토리에 올렸다. 그래서 호감이 없는 게 아니라면 인스타 dm으로 만나고 싶지 않아서 자연스레 다시 만나는 일을 기다리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매우 얕은 증거였지만 무엇보다도 서로의 감정이 전해진 것 같은 그 순간이 뇌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서로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말이 전해진 것 같은 그 때의 순간. 

그러다 어느날 뜬 지연이의 인스타 스토리 게시물. 모 학원에서 시간이 비어 그 시간에 원데이 클래스를 연다는 것이다. 지연이를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2년이 지난 지금. 그렇다고 갑자기 이렇게 나타나면 어떻게 생각할까? 계획을 짜야했다. 예전에 친구가 춤 배우고 싶다는 얘기를 했어서 얘랑 같이 가고, '전 춤 좋아하고 친구가 춤 배워보고 싶다기에 같이 왔어요' 하는 게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친구에게 이 날 시간되냐고 물었지만 선약이 있다고 한다. 혼자 클래스 들으러 간다는 생각으로 가야했다. 괜히 같이 듣는 사람과 지연이 수업 방해하지 말고. 수업 듣는 동안 수업에만 집중하고. 아직도 서로 호감이 있는 것 같으면 끝나고 대시해도 늦지 않는다. 

그리고 지연이 클래스 당일. 건물 층 하나를 차지한 작은 학원. 학원에 들어가니  4명 정도의 사람 밖에 보이지 않아 지연이 수업을 들을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북도에서 지연이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어. 오랜만이네요.'
'네' 
'곧 시작하니까 기다리고 계세요.'
저음의 목소리만 들어봤던 지연이(그래봤자 두세줄이지만)는 하이톤의 목소리로 바뀌었었다. 다행히도 불편해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지연이 수업을 듣는 사람은 나 포함 남자 두 명, 지연이 포함 여자 세명이었다. 알고 보니 나 제외 다른 사람들은 서로 아는 사이인 거 같았다. 나 외엔 지연이 지인들이 클래스에 온 것 같았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하고… 뭔가 이상했다. 
바지 주머니가 없어 혹시라도 밟을까 핸드폰을 벽에 세워뒀는데, 지연이가 핸드폰 쪽으로 가며 확인하는 것이었다. 
다른 클래스 혼자 가면 가끔 겪는 일이었다. 혹시나 처음 보는 사람이 촬영해 가는 거 아닌가라는 의심. 그런데 지연이는 뭔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듯 좀 긴 시간을 내 핸드폰 주변에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러는거지..? 내가 과하게 생각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날 싫어하는 느낌은 아닌 거 같았다. 내가 동작을 못 따라오고 있으면 옆에서 같이 해주기도 했기 떄문이다. 하지만 뭐라 표현 못 하겠는, 미묘한 무시하는 느낌인가, 뭔지 모를 불쾌감이 스며들었다.
수업 끝날 때 쯤 여자, 남자로 그룹을 나눠 연습한 안무를 보여줄 떄 '이제 남자들... (차례)' 라고 말하는 미소한 경멸이 섞인 지연이 말투에서 다른 남자얘도 지연이에게 호감이 있어서 이 클래스에 왔다는 걸 깨달았다. 지연이는 나를 갑자기 클래스를 수강하러 들어 온 처음 보는 아저씨처럼 생각한다는 걸 알았다. 미묘하고 특별히 어떤 행동에서 그렇게 느꼈는지 떠올릴 수 없었지만, 1시간 동안 같이 있으면서 그렇게 생각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수업이 끝났다. 먼저 연습실에서 나왔지만 허무함과 이렇게 갈 순 없다는 생각에 정수기에서 물을 마셨다. 몇명인지 모를 사람들이 지나가고, 물을 다 마시고 돌아보니 옆 의자에 지연이가 앉아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예전에 힙합 클래스 같이 듣던 분이시죠? ㅇㅇ에서?'
'아.. 기억 하시네요. OO 힙합 클래스 같이 들었어요.'
'진짜 오랜만이네요.'
'네 맞아요.' 
'수업 어땠나요?'
'너무 힘들었어요.. 동작이 너무 빨라가지고 따라가는데 어려웠습니다..'
'아.. 오늘 안무가 좀 빨랐긴 하죠.'
솔직한 감상이었다. 체구가 작을수록 빠른 춤 추는데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전공이 뭔가요.. 힙합이에요?'
'코레오요.'
지연이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무 영상은 많이 올리지만 어떤 전공인지는 안 적어서 몰랐다. 뉴스쿨 힙합은 코레오랑 구분하기 힘들기도 하고. 

정적이 흘렀다. 

'예전에 OO 학원 다녔을 때 볼때마다 되게 밝고 열심히 하셨던 게 기억에 남아서... 인스타 게시물에 뜨길래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 왔습니다.'
중의적이고 애매한 표현. 혹시나 싶어 모 학원 인스타도 팔로우 했었다. 예전에 지연이 인스타를 말없이 팔로우한 것에 대해 내키지 않아하는 경우, 종종 이 학원에서 수업을 들어서 홍보 게시물을 보고 왔다고 하려고 했다. 
'아.. 그랬군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끝맺는 말을 했다. 약간의 당황한 표정이 보인 거 같은 건 내 착각이겠지. 그 말을 마치자 지연이는 친구들 곁으로 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끊임없이 생각했다. 전부 다 내 착각이었을까. 이틀 전까지만 해도 지연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신났는데, 수업이 끝난 지금은 너무 허무했다. 얼만 전까지도 상상한 건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가 왜 이렇게 느낄까. 내 기대가 큰 나머지 별 거 아닌 걸 과하게 생각하는 거라고 몇 번이나 생각하다가 그렇게 느껴질 이유가 있었고 나도 행동도 그렇게 했는데 내가 못 받아들인 것 뿐인 걸 받아들였다. 원망은 없었다. 너무 쉽게 진행됐다고 생각했지. 

 


어디서 잘못된 걸까? 


나 혼자 운명적인 사랑으로 여기며 혼자 굴을 판 거 같지 않다. 평소 눈치보는 성격 탓에 평소에 사람들의 표정을 세밀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방금 지연이가 나를 보았던 느낌을 잘 못 보았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2년 지연이의 호감을 내가 착각했을 리도 없었다. 이미 몇 번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 대형 교양 강의 막날, 여자 4명과 팀이 된 적 있다. 간단한 과제를 수행하는 일이었는데 여자들 모두 갑자기 행동을 매우 의식하거나, 힐끔힐끔 쳐다보는 온갖 척은 다하고, 집적적으로 다가오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 것이다. 거기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자친구가 그 중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은 단 한 명이었다. 내가 거기에 속아넘어가 티날만한 행동을 하나도 안 했던 걸 다행으로 여겼다. 
그래서 거르고 거르고, 자신의 호감을 감추지 못하고 솔직하게 드러나는 것 같은 지연이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열 수 있었는데…

2년 사이 지연이가 달라진 것일까? 이번에 본 지연이의 모습도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말하기 그렇지만 도파민에 중독된 여타 다른 여자들과 같이 느껴졌다. 예전에 내가 봤던 내성적이고 어딘가 조심스러워 하는듯한 모습은 이제 없었다. 

대학 처음 입학하거나 동아리 처음 들어올 때는 심히 내성적이나 대학 생활과 동아리 생활을 하며 외향적이 되는 여자들이 있었다. 긍정적인 성격으로 변하는 건 좋은 방향이지만 남자들의 호감을 양식으로 성장했다는 게 눈에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연이에게 비슷한 느낌을 느꼈다. 

지연이의 첫 내 휴대폰 위치를 보는 행동. 지금 생각하면 일부러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짜고짜 얘기도 안 하고 가서, 지금은 별 생각 없는데 적극적으로 대시할 까봐 미리 저런 행동으로 선수를 친 것이다. 

모르겠다. 과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어쨌든 끝난 건 끝난 것이다. 2년 기다린 짝사랑의 결과는 너무 허무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생각하다가 고등학교 때도 졸업과 동시에 헤어지는 커플들이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단지 그뿐이었던 것이다. 나를 좋아했었다면 졸업하고 4개월이 지나고, 별 것 아닌 인스타 질문에 내가 답했을 때 단지 인스타에 표시를 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답장을 하거나 만나려는 행동을 했겠지. 이걸 인식하고 나서야 나를 좋아한 게 아닌 걸 받아들였다.

그래도 습관이라는 게 무서운 게, 그렇게 결심했어도 불구하고 계속 생각났다. 이렇게 된 게 너무 아쉽고 미웠지만, 다시 다가 온 다면 친해지고 싶었다. 이 정도 쯤이야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2년 동안 안 봤으니… 실컷 썸 타놓고 나중에 밥 한 번 먹자하니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정색하며 다음 날 바로 다른 남자애한테 여우짓하는 얘도 있었는데.. 이 정도 망설임 정도는 여자애들이 할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연락할 순 없었다. 걔가 그렇게 대했는데 내가 현재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인스타 DM으로 연락하면 이번에야 말로 나에 대한 존중과 인간으로서의 평가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나나 그 애나 이렇게 장기적으로 일주일 한 번씩 꾸준히 만나며 호감을 표현하는 사람을 어디에서 만나나? 내 인생 앞으로도 이렇게 장기적으로 꾸준히 만나며 친해질 사람이 있을까. 지연이가 예전 추억을 떠올리고 적극적으로 다가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다가와주면 나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지나고 아무 일도 없었다. 

왜 달라졌을까? 지연이도 이제 고등학생도 졸업했고 인스타도 이제 천명이 넘어 협찬도 들어오니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난 단지 조용하고 자존감이 낮던 시기에 적절히 호감을 표시해 준 사람에 지나지 않았고. 그 호감이 싫지도 않았고, 좋았지만 이제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보고 싶지 않았던. 그래도 나 혼자 착각하는 애매한 상태가 유지된 건, 최후의 보루가 있었다는 생각. 

하지만 나라고 다를까. 
진화심리학에서 여자가 높이 평가하는 건 자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남자의 능력이고, 남자가 높게 평가하는 건 여자의 출산 능력을 암시하는 젊음과 외모이다. 
내가 좋아했던 지연이의 볼 빵빵이란 특성도 20대 초반의 특성이란 걸 깨달았다.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20, 21살 넘으면 빠르게 없어지고, 볼살을 호감 요소로 보는 남자들도 꽤 있는 거 같았다. 나이도 대학원생이고 나도 지연이를 이렇게 예쁘고 어리고 성격 좋은 사람은 이제 다시 만날 일은 없다고 생각해 좋아했을 뿐일 것이다. 

비극도 희극도 아니고, 단지 현실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우연히도 9개월 뒤 또 만나게 되었다. 새로운 취미로 클라이밍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담한 두 여자애가 내 옆에서 다른 문제를 풀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익숙한 얼굴이다 생각하고 쳐다보다가 옆에서 여자애가 '지연아'라고 부르고 나서 이 얘가 지연이인 걸 깨달았다. 지연이는 나인걸 못 깨달은 것 같았다. 별다른 반응 없이 3분 정도 뒤 친구와 함께 다른 문제 풀러 나갔다. 
'이런 거 겠지'라고 생각했다. 운명이란 없고, 시간이 지나면 바로 옆인데도 서로인지도 못 알아보는 게 현실이겠지. 애초에 나를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런데 30분 정도 지나고 이번에는 꽤 떨어진 거리에서 문제를 풀면서 지연이는 이번에는 나인 걸 꺠달은 것 같았다. 이번에는 호감 섞이고 약간의 반가움도 눈에 보이는 게 지난 번 지연이 클래스 갔을 때와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나는 아무 반응 없이 무표정이었다. 3분 정도 뒤 집으로 가려 탈의실로 이동했다. 운동한지 어느덧 2시간이 넘었고 체력도 없었다.  

나가기 전 휴식공간을 지나가면서 지연이가 친구들과 같이 앉아 있는 거 보였다. 지나가며 나에게 얼핏 말을 걸지 않을까 의식하는 느낌에 나를 그렇게 싫어하진 않구나 생각했다. 

 


그로부터 1년 뒤 홍대입구역 이동통로를 지나가면서 서로 마주치고 지나갔다.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내가 쳐다보자 고개를 내려서 나인 걸 알아챘는지는 모르겠다. 그간 운동을 많이 해서 체형이 달라졌었기 때문이다 (자랑). 
그로부터 또 8개월 뒤, 뭐 하고 사나 인스타를 확인하다가 남자친구가 생긴 걸 알았다. 이제 인스타 팔로워는 만명이 넘고 협찬도 꽤 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제 더 이상 안 봐야겠다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의 나는 크게 내세울 게 없는 것 같았다. 성격도 내성적이고 춤도 잘 추는 편도 아니었고, 10대들이나 다니는 이런 학원에서 시간을 때우는 사람으로 봤을지 모른다. 아무리 같이 시간을 보내고 좋은 감정이 있었더라도, 추억만을 믿고 깊은 관계를 맺기는 너무 가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 때의 지연이는 그런 나를 정말로 순수히 좋아해주었구나 생각헀다. 주 한 번 그 학원을 다닌 1년은 내 인생 가장 행복했던 때 중 하나였다. 지연이를 마지막 보고 30살이 된 지금까지도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종종 웃음이 떠오르는 것 보면, 난 아직도 그 시절의 지연이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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