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릿 댄스를 더 배우고 싶어서 댄스 학원에 등록했다. 대학교 스트릿 댄스 동아리에서 1년간 활동했지만 거의 공연 안무만 반복하고, 그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가까웠던 댄스 학원에 등록해서 힙합이란 장르를 좀 더 알고자 했다. 마침 대학원 입시도 끝나 시간이 남았었다.
처음 댄스 학원 수업에 들어갔을 때 놀랐다. 고등학생, 중학생 들이 대부분이었다. 동아리 사람들이 '스쿨을 다녀야 한다, 어떤 쌤 레슨 좋다' 떠들곤 해 취미로 배우는 대학생들이 가장 많을 줄 알았는데, 입시생이 대부분이었다. 대부분 10대 후반이었다는 게 놀랐다. 이른 나이부터 준비를 하는구나 생각했다. 춤이 입시 준비면 당연하지만.. 중학생도 종종 있었고 아주 가끔 나와 같은 20대들이 수업을 들었다. 학창시절 기숙사 학교에 다녀서 공부 외의 분야를 노력하는 학생들을 보는 건 신선했다. 학창시절 교실은 조용하고 공기가 정체된 것 같았는데, 여기는 학원임에도 불구하고 에너지가 넘쳤다. 학원이 재밌을 수 있다고는 내 학창시절을 생각했을 땐 비춰 봤을 때 전혀 생각치도 못한 일이었다. 인간은 역시 움직여야 행복을 느끼게 설계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수업이 끝나기 전 그룹을 나눠 각자 오늘 익힌 안무를 보여주는 시간에 학생들은 서로 환호하거나 응원해주곤 했다. 같은 안무여도 사람마다 스타일이나 느낌이 달라 보는 재미가 있었다. 웃음과 에너지가 가득 넘쳤다. 올 때마다 학생들의 에너지를 받는 것 같았다 어느새 이 분위기가 좋아져 유연성이 중요한 운동을 한다는 생각으로 한동안 주에 한 번 정도 이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이렇게 1년 가까이 다닌 댄스 학원은 내게 치유의 시간이 되었다. 학원을 다니는 사람들과 크게 친해지지는 못 했지만 10대 얘들도 가끔 있는 20대 얘들도 모두 친절하게 대해줬다. 크게 관심이 없으니 싸울 일도 없고 친하지 않지만 친절만 있는 상태. 딱 이 정도의 관계가 그 때의 내게 너무 좋았다. 너무 냉철하게 말했지만, 그것 외에도 원래 춤으로 입시하는 얘들은 이렇게 밝고 착한가 생각하고 나도 고등학생 때 취미로 댄스학원을 다녔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좋았다.
댄스 학원을 다닌지 2개월이 지나고 새해가 되었다. 나는 26살 대학원생이 되었고 내가 듣던 클래스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새해 첫 클래스, 새로운 얼굴들이 다수 보이고 그 중 연습실 한 쪽 거울 벽에서 연습을 하고 있는 학생이 있었다. 연예인 연습생을 보면 이런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키는 작은 편이고, 섹시하다기 보단 귀염상이었고, 내성적이면서도 생기가 넘치는 밝은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특징적인 건 볼살이 매우 통통했다. 눈이 크고 볼에 뭔가를 머금었을 정도로 볼륨감이 있어 디즈니에 나올법한 토끼 혹은 다람쥐를 매우 연상시켰다. 이름은 지연이라고 들었다. 행동을 보면 뭔가 소동물을 느낌이 났다.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지연이를 보면서 얼핏 나랑 비슷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말이 거의 없는 편이고, 내성적이었지만 세상에 대해 열려 있었다. 뭔가를 거부하는 느낌이 없고, 호기심을 가지고 매번 수업 때 성실히 연습하며 눈에서 빛을 잃지 않는 모습이 신기했다. 어느새 수업 들으면서 얘를 관찰하는 게 취미가 되었다. 매번 밝은 분위기로 거울 앞에서 연습하는 게 연예인 연습생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 달 쯤이 지났나, 어차피 신경도 쓰지 않을거라 생각하고 얘 인스타를 팔로우 했다. 아이돌 구경하는 것처럼 순수하게 연습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학원생(26살), 고등학생(19살)이고 나는 말도 없이 혼자 수업만 듣고 나가는 편이라 이 이상 관계가 진전될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지연이도 나를 종종 보는 것 같았다. 자신을 그런 모습으로 바라봐 준다는 게 전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 나쁘지 않은 듯 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4월 중반 어느 날. 댄스 학원에서는 연습실 열쇠를 두꺼비집 안에 넣어두고, 연습실 문이 잠기면 수강생들이 그걸로 문을 열었다. 그 날은 지연이가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고 다른 사람들은 다 들어갔다. 내가 마지막이기도 하고 지연이가 문을 열었는데 지연이만 남겨두고 나도 쪼르르 들어가긴 뭐 했긴 때문이다. 지연이가 다른 손은 내린 채 한손으로 열쇠를 넣어서 내가 두꺼비집 문을 닫았다.
그러자 지연이가 내 손 위에 손을 얹고 살짝 눌러 두꺼비집 잠금장치를 닫았다.
사고가 잠시 멈췄다. 평정심을 유지하다 연습실에 들어가 앉자, 미소가 베어나왔다. 거울 맞은 편 마찬가지로 미소를 참는듯한 지연이의 모습이 보였다.
날 이후 지연이가 급격히 의식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서로 말 한마디 나눈 적 없었지만, 서로 근처에서 연습하며 서로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깊은 교류가 있었다. 눈 마주침과 서로 의식하며 하는 작은 행동들이 기억에 남았다. 말 한마디 없이도 이렇게까지 관계를 쌓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처음 만난 후 이렇게까지 호감이 생기기까지 5개월이 지났을까, 그런데 서로 아직 가벼운 인사 외에 한마디를 한 적이 없었다. 바뀐 건 서로를 편히 쳐다보게 된 것. 그렇게 몇 개월을 지냈어도, 서로 아직 말은 한마디도 못 나눈 게 우리의 모습 같았다.
그 외에 알게 된 지연이 특징들 몇가지. 살이 찌기 쉬운 편인 거 같았다. 연휴 후 갑자기 살이 많이 쪄서 타났는데, 그 중 볼이 특히 통통하게 살찐 게 다람쥐가 볼에 먹이를 저장한 모습 같았다. 더욱 놀라운 건 그 일주일 뒤에 배꼽이 드러나는 티셔츠를 입고 왔다는 것이다. 살 찌고 빠지기 쉬운 체질이거나 자기관리가 철저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또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게시물에 댓글이 달리면, 남녀 친구들 상관없이 일일이 답변해 주는 모습을 보였다. 할 말 없는 댓글이나 별생각 없이 가볍게 단 댓글도 무시하지 않고 정성껏 답변해 주는 모습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를 중요시한다는 것을 느꼈다.
6월 중반이 되자 아쉽게도 지연이는 이 클래스를 안 듣게 된다고 한다. 마지막 날 클래스 사람들끼리 간단히 인사를 했다. 그래도 같은 학원이고 오다가다 마주치겠지 했지만 결국 그 후 2개월 동안 지연이를 못 보게 되었다.
얼마 후 수업의 강사님과 다른 강사님이 합동으로 진행하는 팝업 클래스를 연다고 한다. 마침 내 댄스 학원 등록이 끝나는 기간과 같았고 이 클래스를 마지막으로 댄스 학원도 그만 다닐 생각이었다. 처음엔 좋았지만 깊게 친해지지 못하는 관계에 조금 회의를 느꼈고, 이제 다른 할 게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지연이라면 이 클래스를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분 다 지연이가 자주 듣는 클래스의 선생님이었다. 만약 아니라면 이제 지연이는 못 보게 되겠지만.
그리고 예상은 맞았다. 8월 마지막 날에 진행된 이 클래스는 사람들이 많이 신청해 연습실은 붐볐다. 수업이 시작되고 몸을 풀고 있자 5분 뒤 지연이가 왔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어떻게 할지 몰랐다. 애초에 사람이 너무 많았고 시끄러워 머릿속에 시뮬레이션하던 '오래만이에요, 잘 지냈나요'로 대화를 열겠다는 방안은 불가능해 보였다. 자리도 떨어져 있어 곁으로 가기에는 눈에 너무 띄었다. 그렇게 어느덧 클래스 시간은 막바지를 향해 갔다.
수업이 끝나고 원으로 둘러앉아 질문을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앉고 마지막에 지연이가 앉을 자리는 내 옆 밖에 없었다. 지연이 쪽을 보자 뭔가 허탈한 표정이었다. 실망도 언뜻 보이는 것 같은. 내 옆에 오길 조금 주저하다가 옆에 앉았다. 어느덧 질문시간은 끝나고 수업을 마치며 모두 일어났다.
아, 이대로 끝나는 것이구나.
내 한계였다. 사람들과 친해질 줄 모르고 내성적이어 말도 없으니, 시선을 주는 것 외에 호감을 표현할 방법을 몰랐다. 사람들이 싫고 낯가림도 심하니 다같이 있는 곳이면 말이 없었다. 대화로 인해 자연스레 생기는 흐름이 없으니 뭘 해도 어색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순간 선생님이 말했다.
'아, 잠깐만요. 아쉬우니 다같이 사진 하나 찍고 가자'
'좋아요~!'
'손은 어떤 모양으로 하지~'
'하트! 하트요'
사진 찍으러 거울 앞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순간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다같이 있는 이 자리에서 어색하지도 않고 눈에 크게 띄지도 않으며 내 호감을 표현할 방법.
나도 손으로 하트를 만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시선은 거울 속 지연이를 보며. 지연이는 좀 떨어진 왼쪽 아래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표현이었다. 지연이가 이쪽을 보고, 그제서야 지연이의 표정에도 미소가 넘쳤다. 이런 식으로 호감을 표현하면 되는구나 처음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런 게 서로를 인식하는 우리들 나름의 방식이었던 거 같다.
그리고 다음 날, 지연이 인스타 스토리에는 아담한 하얀색 하트가 떳다. 인스타 스토리에 어제 춤 영상을 찍은 것과, 흐린 배경에 하얀색 하트 이모티콘이 뜬 것과, 노래 가사 전체를 캡처한 스토리 3개가 올라왔던 것이다. 노래 가사는 물론 사랑과 설렘을 표현한 가사였다. 지금은 아무 관계도 아니니 이런 식으로 마음을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 둘이 대화한 분량만 따지자면 한 문단도 못 채울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깊은 유대감을 느낀다는 건 우리 사이가 특별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이 사람과 정말 오래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연이를 내가 키우고 싶었다. 지연이 아빠는 얼마나 행복할까. 이 얘랑 평생 사귀게 되어도 행복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또 나중에 현실적으로 지연이가 나이를 먹어 이성적 매력이 떨어지더라도, 지연이 같은 딸을 낳으면 또 얼마나 귀엽고 행복할까 생각했다. 이런 얘를 만나게 되다니..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말주변이 뛰어나지도 않아 대부분 혼자였고 친구도 없었다. 사람들과 관계를 쌓는 게 어려웠다. 이대로 사귈 사람이 없으니 얘를 사귀었다는 평가를 받고 싶지 않았다.
내 가장 큰 문제는 인간관계였다. 직업적 성공은 이대로 대학원생 생활을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크게 뛰어나진 않지만 노력한 만큼의 결과는 나와 남에게 뒤쳐지질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내 가장 큰 열등감은 인간관계였다. 사람들과 친해지는 방법도 모르고, 알게 모르게 사람들에게 배척받기 일수 였다. 앞으로 필사적으로 이러한 면을 발전시키자고 결심했다.
이성관계 없이 26살이라는 사실도 드러내기 무서웠다. 어디서 능력없으니 고등학생 구슬려 사귄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 일단 아무나 사귀고 지연이 만나면 헤어지고, 나 자신과 사람들에게 떳떳하다는 평가를 받고 싶었다.
언제 볼지는 모르나 다시 지연이를 만날 때까지 인간관계 면에서도, 내 능력 면에서도 많이 발전한 모습으로 만나야지... 그렇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