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말, 정기공연이 끝나고 원형 탁자가 놓인 삼겹살집에서 뒷풀이를 가졌다. 주하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고, 서로 인스타를 교환하면서 대각선에 앉은 연미와도 인스타를 주고받았다. 이제 동아리는 기말고사 준비로 3주간 휴식기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연미와는 인스타로 좀 더 가까워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연미가 올린 인스타 스토리에 두 번 답장을 보내고, 세 번째로 연미가 동성 친구 셋과 작은 파티를 하는 스토리를 올렸을 때, '나도 연미 님이랑 치킨 먹고 싶다'고 답했다. 물론 흐름에 따라 만날 약속을 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답장은 없었다. 이유야 생각하면 끝이 없었고, 어느 순간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하길 그만뒀다. 그래도 이것만으로 단정 짓긴 이르다 싶어 크리스마스에 안부 메시지를 보냈지만, 역시나 답은 없었다. 휴식기가 끝나고 다시 봤을 때, 연미는 내 눈치를 살피듯 이쪽을 잠깐 쳐다보고는, 그 후론 아무 일도 없었다.
새삼 연애시장에서의 내 위치를 알 것 같았다. 호감가는 점은 있어도 평균보다 약간 낮은 키(168~170cm)나 아직 안정된 직업이 없는 대학원생이라는 신분 등 사귀기에는 결정적인 요인이 부족하다. 그렇기에 사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DT 동아리의 올해 활동이 마무리되었다. 새해가 되자 선배 기수들은 OB(동아리 졸업생)가 되어 정기 활동에서 빠졌고, 각 장르별로 새 팀장이 선출되었다. 힙합 장르 인원은 나를 포함해 남자 4명, 여자 11명으로 줄었다. 동아리 활동은 한동안 평화롭게 이어졌다.
어느 날 힙합 인원끼리 원을 이루고 프리스타일 춤을 연습하던 중, 여자애 한 명이 갑자기 내 쪽으로 다가와 힙합 춤을 추고는, 무안했는지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내심 놀랐다. 말수도 적고 내성적인 친구라 지난 1년간 서로 엮일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친구가 있는 애여서, 딱히 의미를 두진 않았다.
또 다른 한명은 가끔 내 주변을 기웃거렸다. 마찬가지로 남자 친구가 있었지만, 좋게 보면 관심의 표현이고, 나쁘게 보면 한번 찔러보는거다. 내가 어떤 이성적 관심을 표현하면 바로 모른 척할 게 뻔하고, 친해질 생각도 없기에 저런 행동에서 끝난다. 그래도 그런 행동이 다소 귀엽고 기분 좋은 건 사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단체 안무 연습 중 고개를 숙이다가 들었는데, 마침 그 앞을 주하가 지나갔다. 순간 주하는 '방금 OO 선배랑 키스할 뻔했어'라며 옆에 있던 문수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문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누나, 그럴 때는 저리 비켜 말하고 선배 밀쳐야 돼. 알았지?'라고 성희롱이라도 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 주하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그날 이후로 주하는 단체 안무 중 나와 가까워지기만 하면 나를 세게 밀쳤다. 세 번째 그런 행동이 반복되자 화가 나 '야 밀지마' 라고 쏘아붙이고 나서야 주하는 그런 행동을 멈췄다. 그 뒤로는 주하와 되도록 거리를 두었다.
작년부터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던 두 명은 다시금 얹짢은 내색을 드러냈다. 그중 한 명인 문수는 올해 동아리 부회장이 되었고, 그 이후로 인솔 등으로 내가 뭔가 말할 거리가 생기면 꼭 나에게 소리를 높여 말하는 것이었다. 춤을 출 때 때리는 듯한 동작을 내 쪽으로 향하거나, 몸이 아슬아슬하게 부딪힐 듯 지나가고, 내가 연습 중이면 일부러 앞에 와 거울을 가리는 행동이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못 본 척 넘겼지만, 갈수록 심해져 맞대응하려 해도 문수는 교묘하게 내가 방심하고 있을 때만을 노렸다. 나보다 체구도 훨씬 작은데, 왜 계속 저러는지 모르겠다. 문수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동아리에 들어와 나와 9살 차이가 나지만, 그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 게 분명했다. 오히려 자신보다 큰 상대를 이렇게 지속적으로 은근히 자극하고 밀치는 것을 문수는 자기 능력이라 생각할 것이다. 나는 이런 것들을 대처하는 방법이 부족했고, 문수는 그걸 정확하게 파악했다.
동아리 활동이 끝나고 한마디 하려고 문수에게 다가가려다, 순간 울컥하는 감정에 잠시 주저앉고 말았다. 갑자기 울분이 쌓여 제대로 말이 안 나올 것 같았다. 그사이 타이밍을 놓쳐 문수는 친구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버렸다. 다음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5분 뒤 편의점에서 문수와 마주치고, '거울 가리지마.', '네?', '너가 자꾸 나한테 시비 거는 것 같아서', '아, 네. 알겠습니다'의 교류를 거친 뒤 대충 대답하는 것 같아서 '너 계속 그러면 진짜 한 대 맞을 줄 알아!' 소리쳤다. 그 뒤로 남은 마지막 연습 한 번은 별일 없이 지나갔고, 동아리는 다시 기말고사를 위해 휴강기에 들어갔다. 그렇게 2년차 1학기 활동이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