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휴학 2학기 차, 대학에 들어오고 3년이 지났다. 부모님께는  학기 동안 전공 공부가 어려워 이해가 안 되니 부족한 부분을 공부하겠다고 한다고 했다. 변명에 가까웠지만 아예 안 한 것도 아니었다.

 

현실(미래?) 대한 걱정은 그다지 없었다. 같은 지역에 대기업의 월급과 워라밸이 보장된 걸로 유명한 일본계 자동차 회사가 있었는데,  일본어 자격증(N1)과 꽤 높은 영어 점수가 있어서 쉽게  회사에 취직할  있을거라고 학과장님이 면담  말씀했다. 같은 지역에 있던  회사는 대기업 월급인데 워라벨 보장된다고 유명했고 우리 대학에서 할당된 인원을 뽑아야 했기 때문에 N2 일본어 자격증이 있으면 거의 확실히 입사할  있다고 소문이 났었다. 지방대에서 전자공학과면서 일본어를 자격증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내 인생 이렇게 흘러가는 대로 둬도 되는건가 의문의 있으면서도 그래도 마지막으로 기댈 곳이 있다는 게 안심되었다.

 

또 이 때 엄마가  대형 tv를 사고 처음으로 유선 방송도 연결했다. 대형 TV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나온다는 게 신기해서 자주 켜게 됐고 토크쇼 예능과 관찰 방송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비정상회담과 썰전, 라디오스타를 좋아했다. 음악방송을 즐겨보지는 않았지만, 아이돌들이 하는 예능은 좋아했다. 좋아하는 아이돌은 오마이걸, 브이앱도 자주 볼 정도로 빠졌었다.

그러고 나니 연예계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 예쁘고 멋진 사람들이  곳에 음악방송 때마다 공연하고 춤추는.. 각자 자기 매력을 뽐낸다. 브이로그에선 자신의 긍정적 성격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예능, 이게 가장 부러웠다. 촬영이라곤 하지만 저렇게 다양한 사람들끼리 모이고, 제작진이 만든 어느 정도 재밌을 거라고 보장된 이벤트가 있다. 저렇게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상이 있다면 저곳이 현실세계의 이상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빛나는 이상과 달리 현실의 나는 초라했다. 누룽지를 먹다가 이 깨졌다. 신경까지 드러났는지, 어쩌다 음식물이 깨진 이 사이로 들어가면 너무 아팠다. 서울에서 치과를 개원한 삼촌이 지방에 내려오게 되어 검사해줬는데, 썩은 이가 한,두개가 아니란 걸 꺠달았다. 충치가 7~8개에 신경치료 해야될   개… 안 아파서 몰랐었다. 치료비도  백만원   같으니 주기적으로 서울로 올라와 (ktx 3시간 거리..) 삼촌 치과에서 치료를 받으라 했다. 스트레스 받으면 와인이나 커피를 마시고 정신이 소모되어 잠에 빠질 때까지 한탄을 반복한 탓에 이렇게 썩은 것이었다.

 

그렇게  학기가 지나갔다. 난 휴학 1년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린건가? 미칠  같았다. 3년 반을 제자리 걸음하는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건 뭘까? 이대로 아무 것에도 제대로 노력하지 않은 채 취직하고 결혼하고 살면 되나?

빛나고 싶다. 테레비에 나오는 연예인들처럼. 이대로 아무것도 없는 대학생활 보내다 취업해서 결혼하고 살고 싶지 않다.

일단 서울로 올라가면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뭐든 좋았다. 단지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다. 시간이 정체된 내 감옥같은 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뭐라도 해야됐다.

 

원룸 후보를 고르고 부모님께 한 학기 동안 서울에서 알바하며 자취하겠다고 했다.

반대했다. 당연했다. 이미 1년 휴학을 했는데 한 학기 또 휴학하며 이번엔 서울에서 혼자 지내겠다니. 이번엔 뭘 하겠다는 계획조차 없었다. 단지 새로운 환경에서 지내보고 싶다는 것 뿐…

하지만 1주일 간 의논 끝에 서울에 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어차피 삼촌 치과에서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했기 때문인가 서울에 있으면서 2~3 간격으로 통원하라고 했다. 3   정체된  인생이 풀릴  같아 희망이 보였다.

동생이 다니는 서강대 근처, 신촌에 있는 한 고시텔에서 살게 됐다. 내 생각한 (신림)보다 월세가 15만원 비싸지만 부모님이 내줄테니 동생 근처에서 살라고 했다. 이것 만큼은 감사함을 느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에서 서울에 있는 최대 3개월 동안은 열심히 살자고 결심했다.

 

내가  게스트 하우스는 신촌대로 바로  길에 있었다. 젊음과 활기가 넘쳐났다.  인생 이렇게 많은 청춘들을  적이 있었는가. 내가 사는 곳은 한적해서 좋지만  또래를  일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대학교  번화가도 발달된 편이 아니었고. 학교 축제  많은 사람들이 모이긴 했지만, 그것과 다른 느낌이 들었다. 단지 몰려 있는  아리나 커플들과 친구들이 2~4  담소를 나누며 지나가는  산뜻하고 평화로운 느낌이 들었다. 신촌대로 노란색  줄 조명으로 장식되어 따뜻한 노란색 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 빛나고 있었구나 생각했다. 과 생기와 에너지가 넘치는 거리. 초라했 나는 그걸 모르고 있었다.

알바를 구하고 보컬 학원과 함께 취미인 피아노 학원을 등록하고, 며칠 간격으로 삼촌의 치과에 다녔다. 꼬박   동안 2,3 간격으로 치과에 통학하면서 자신의 한심함을 느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관리를 소홀히 해선  된다. 자신이 한심하고 우울하다고 기본적인 건강관리조차  하면, 이는  다시 도미노처럼 다른 나쁜 일을 불러온다.

 

그리고  달이 지났다. 아쉽게도 노래에 재능 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말을 거의  해서 노래는 투자한 시간에 비해 실력이 거의 늘지 않았다. 서울 처음 올라왔을 때는 모든  잘될  같이 희망적이었지만,  달이 지나니 역시 익숙해지고  자신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알바, 피아노&보컬 학원, 헬스장만 반복적으로 다닐 ,  이상의 뭔가를  찾았다. 공간이 서울로만 바뀌었을 ... 나는 여기서 뭐하는 것일까. 활기 넘치는 밖과 달리 원룸텔은 너무 조용했다.

 

야간 알바를 하고 나온 어느  아침 8. 집으로 돌아가면서 보는 아침의 신촌거리는 새로웠다. 저녁에는 데이트 장소, 버스킹 장소, 학생들의 유흥거리였던 장소가 아침이면 통학로로 바뀌는 것이었다. 밤엔 정처없이 무작위로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아침에는 목적을 가지고  방향으로 대로를 따라 학교로 나가고 있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뭔지 생각했다.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가능성이 일말이라도 있으면 시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왔지만 한낱 도피 뿐이었을까.

사실 연예인이 되고 싶은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이 지루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떠오른게 내게 그것밖에 없었다.

예쁘고 멋진 사람들이, 청춘을 즐기는 세계. 밝고 화려한 현실이  현실과 대비되어서 좋았지만.. 이미 많이 늦었을지도 모른다.

 

지방대생 특채로 들어가 좋은 직장에 들어가 편하게   있었는데,  길을 포기하고   원하는 것일까.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학창시절 험담 시작되기 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인간관계 원만히 해내 걱정없이 공부하고, 애니나 방송에서 보던 청춘을 나도 즐기고 싶었다. 친구들과 여행도 가고, 연애도 하고, 20대를 후회없이 즐기고 싶었다.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순간 어디선가 들었던 편입이란  떠올랐다. 혹시나 싶은 생각으로 조사해 보니 수능과 달리 편입은 영어와 공학수학으로 시험을 본다고 한다. 당시 9 초반으로 편입하기엔 학교에 따라 한달에서   남은 상황이였다. 하지만 영어는 잘하는 편이고 편입수학은 수능수학과 달리 암기 위주의 문제라고 해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영어성적만 요구하는 곳도 있었다.

그렇게 신촌에 오고 6주차, 편입을 결심했다. 목표를 정했으니  이상 신촌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본가에 내려가 학교 도서실에서 편입수학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공부했다. 이렇게 한가지 목표에 진심으로 몰두하는 게 얼마만인가..?

그리고 편입 시험 당일. 그랬어도 시간은 부족해서 공학수학 이론만 익히고 문제는 많이 풀지 못한 상황이었다. 편입 수학은 어렵지는 않지만 외워야  공식이 많아 즉각 떠오르지 않으면 시간 내에 풀지 못 한 다는 게 특징인데... 수학 성적은 당연히 낮을  생각하고 영어성적을 믿을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합격 팔표. 역시나 원서를 넣은 다섯군데 중 네군데는 불합격이었다. 남은 한 곳은 TOEIC 성적과 면접만이 평가 기준이었다.

1차 합격자 발표. 합격자 명단에 없었다. 2차 합격자. 여전히 불합격이었다.

아직 3차 발표가 남아있었다. 기존 합격자가 등록하지 않을 경우 자리가 생기는. 간절히 기도했다. 여기서 떨어지면 또 그 지루한 집에 박혀있게 된다. 하지만 추가 합격인 3차 발표에 결국 합격 통지를 받을 수 있었다. 'TOEIC 970점으로 지원했는데 3차 합격이야?'란 생각이 들긴했다.

 

결국 내가 찾지 않았을 뿐, 항상 기회는 내 곁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어 실력은 항상 있었으니 언제든지 지원만 하면 됐다.

편입에 성공하고 개학까지 남은 두달 정도, 부족했던 전공 공부를 보충했다. 편입수학을 공부하고 나니 이전엔  생략했던 유도과정들이 이해가 되고 전공공부가  쉬워졌다. 그리고 편입  학기, 전공 5과목을 수강하고 평균 평점 A를 받았다.

 

그렇게 암흑기 4년간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렇게 행복한 삶이 시작되면 좋았겠지만...  뒤로도 여러 문제 때문에 또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한다. 당연한 게 장장 4년간 거의 집에만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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